브랜드는 만들 줄도 모르면서, 만들고 있었다
얼마 전 정모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너무 즐겁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정모였어요.
제가 크게 관여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사람들끼리 소통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 분 한 분 너무 친해져서 즐거웠지만, 그중 한 분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요.
퍼스널 브랜딩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고, 심지어 제 답변을 녹음까지 해가셨죠.
브랜딩에 대해서 1도 모르는 제가 무언가 아는 척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될까 봐 더 조심스러웠고요. 그래서 그날은 그냥 조심스럽게 생각들을 말하고 끝났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브랜드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드는 거지?’
근데 물론, 일단은 머리 백로그에 넣어두고 인수에 집중
오늘(!!) 주방잡화 스토어 인수가 마무리가 되었지만 최근 몇 주 동안은, 오퍼레이션 안정화 시키고, 수익성 개선 전략을 이중으로 검증하고, 공급처랑 협상하고, 택배사와 재협상하고… 끝도 없는 일들을 하다 보니 그냥 나중에 고민해야 할 주제 TOP 3 안에만 넣어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수 후 진행하는 수많은 업무 중 가장 중요한 ‘벨류업 전략’을 구체화하고 액션플랜을 짜는 과정에서, 앞으로 우리가 써야 할 플레이북을 점검하다가 다시 또 ‘브랜드’와 직면하게 되는데…
첫 번째 벨류업 후보: PB 상품 제조 전략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취급 상품들을 PB 상품화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인수한 사업체에서 사입해 판매 중인 국내 브랜드 고무장갑이 있는데, 이 상품 페이지는 후기가 천 개 이상 달려 있고, 핵심 키워드 검색 순위도 매우 높아 꾸준히 유입이 들어오는 공간입니다.
이 상품 페이지에 추가구매 상품으로 우리도 중국 고무장갑 OEM 공장에 컨택해 PB 브랜드 상품을 제조해 가성비 좋게 옆에 끼워 넣는 식입니다.
유통채널에서 PB 브랜드를 취급해 사업성을 개선하는 전략은 쿠팡의 대표적인 PB브랜드 Comet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플레이라 너무나도 익숙할 것입니다. 쿠팡 외에도 사실상 대형 쇼핑몰이라면 다들 하는 방식이죠.
하지만 저희 지금 상황에서 PB제품을 개발할 경우 생기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인수 직후엔 기존 상품보다 품질 좋고 저렴하게 만들 만한 시장 및 제품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존 공급업체와의 관계 악화 리스크.
특히 이번 주방잡화 사업체는 소수의 공급업체 SKU가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2번 문제의 리스크가 훨씬 큽니다. 갑자기 저희한테 물건 납품 안해버리면 매출이 크게 떨어지는 상황..
그래서 일단 PB 브랜드 제조 벨류업 전략은 스킵.
그러면, 두 문제를 한 방에?
“시장 이해도 부족 + 공급처 관계 악화를 피하면서 갈 수 있는 묘수가 없을까?”
그래서 예전에 써놓고 실행 못했던 플레이북을 다시 뒤적였습니다.
그러다 스낵 제조 프로젝트 글의 먼지를 털어내며 “아, 이거다” 싶었죠.
즉, 우리의 주방용품 관련 B2C 브랜드를 만들자는 전략입니다.
진양이라는 인수창업가 브랜드를 만든 것처럼, 이번엔 주방 브랜드를 만드는 겁니다.
B2C 주방용품 브랜드를 만들 경우, B2B 주방잡화를 취급하는 기존 공급업체와도 타깃 고객이 조금 다르니 밥그릇 싸움도 피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시장 이해도와 제품 제조 인프라도 쌓을 수 있습니다.
신규 개발 상품은 우리가 인수한 사업체를 통해 유통하면 됩니다.
그래서 다시 ‘브랜드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드는 거지?’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죠.
막상 저는 브랜드 구축 방법을 배운 적도, 공식적으로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뒷걸음질치면서도 진양이라는 뉴스레터를 만들면서, 뭔가 브랜드 비슷한 걸 만들어왔더군요.
그렇다면, 브랜드는 어떻게 만드는가
저는 휘발되는 업무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반복 가능하지 않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쓰는 걸 싫어하죠.
그래서 브랜드를 만든다면, 시스템적으로 잘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브랜드는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구조화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양이 엄청났습니다.
케빈 켈러의 CBBE 브랜드 피라미드, Aaker의 브랜드 자산 모델 등 30년 넘은 고전부터 최신 방법론까지….
이건 일주일 본다고 다 흡수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더군요.
하지만 결국, 인간이 브랜드에 락인되는 수단만 변했을 뿐, 그 이유와 사고 회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반복되는 키워드 중 저한테 울림을 주는 자료들 위주로 추렸습니다.
그리고, 진양이 개인적인 경험과 뇌피셜로 묶은 B2C 브랜드 구축의 핵심 철학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기능적 가치와 감성적 가치의 균형을 통해서 브랜드는 만들어진다. 고객이 합리적인 이유로 선택하고, 감성적인 이유로 머무르게 만드는 곳을 설계하는 업이 브랜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능적 가치와 감성적 가치의 균형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그리고 그 사례가 진양 뉴스레터에도 통용되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내가 뽑은 4개의 기둥 – 진양 뉴스레터 사례와 교차 검증
브랜드 설계 조건을 너무 많이 두면, 그건 그냥 끝없는 체크리스트가 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4개의 기둥만 남겼습니다.
각 기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진양 뉴스레터’를 만들 때는 이게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같이 비교해보죠.
1. 고객 페르소나의 기둥
브랜드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하는 기둥은 고객 페르소나입니다. 이상적인 목표 소비자 프로필을 만들고, 그들의 미충족 욕구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좀 소소한 저의 팁은 ‘관찰 노하우’가 관찰자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저는 타인을 디테일하게 관찰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감정과 사고에는 아주 민감하게 집중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페르소나도 나 자신을 기준으로 잡습니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여야 깊이 파고들 수 있거든요.
진양 뉴스레터 사례
진양 뉴스레터의 경우 초기 독자 페르소나는 ‘3년 전의 나’였습니다.
불안정한 회사를 다니며 미래를 고민하고, 부업으로라도 내 이름으로 된 사업을 갖고 싶어 했던 시절의 나. 그래서 글도 ‘그 시절의 내가 읽고 싶은 주제’로 썼습니다.그 당시 진양의 미충족 욕구는 인수창업 국내 사례를 알고 싶어 했고,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했죠.
2. 기능적 속성 및 편익 기둥 (USP)
‘고객 페르소나’ 기반으로 미충족 욕구를 뽑아냈다면, 이를 해소해줄 기능적 속성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기능적 속성을 잘 뽑아내려면 경쟁사 리서치와 고객 사용 경험이 필수입니다. 여기서 도출한 기능적 속성은 추후 USP의 출발점이 됩니다.
기능적 속성을 추출하기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경쟁사의 VOC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 경쟁사 상품 후기 중 별점 3점 이하만 모아 읽으면 개선할 수 있는 기능적 속성이 쭉 보입니다.
진양 뉴스레터 사례
뉴스레터의 USP는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인수창업 실전 경험기’였습니다.
글을 유난히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산업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한국 시장에 없는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점이 기능적 차별화였습니다.
본질은 ‘남들이 하기 힘든 경험을 남들이 못하는 방식으로 푸는 것’이었죠.
3. 감성적 속성 및 편익 기둥
기능적 속성이 머리를 설득한다면, 감성적 속성은 마음을 붙잡습니다. 브랜드 선택으로 생기는 자부심, 애착, 정서적 혜택 같은 감정입니다.
기능적 속성이 ‘물리적 구현’의 영역이라면, 감성적 속성은 경험 설계를 통해서 연출됩니다.
원하는 감정을 정의한 뒤, 그 감정을 느끼게 할 터치포인트를 고객 여정 전반에 배치하는 거죠.
개발로 치면 User Journey 랑 가장 비슷한 느낌..?
진양 뉴스레터 사례
진양 뉴스레터는 솔직하고 담백한 창업 일지로 유입되어 감정 라포를 형성하기 시작해 → 편안한 분위기의 반말방 카톡방 → 계획 없는 정모 → 현장에서 회포 푸는 자리.
이 터치포인트들이 ‘여긴 인수창업 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숨 쉴 수 있는 커뮤니티’라는 감정을 줍니다.
진양이 딱딱하고 지루한 분위기를 못 견디는 성향이 곧 브랜드의 감성적 USP가 된 겁니다.
왜냐, 고객 페르소나가 ‘진양’이니까요!
4. 신념과 가치의 기둥
브랜드의 핵심 신념은 속일 수 없습니다. 흔들리면 바로 ‘사짜’ 티가 납니다.
적당히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은 위 1~3번 기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1~3번 기둥들과 신념과 유기적으로 묶일 때 단순한 상품에서 브랜드로 진화합니다. 누군가의 믿음이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기 시작하면, 그건 종교처럼 강해지죠.
진양 뉴스레터 사례
진양 뉴스레터의 경우, 핵심 신념은 ‘인수창업이 지금 유행하는 0→1식 창업보다 개인과 사회에 더 건강한 창업 형태’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IT창업의 전형적인 방식(팀 빌딩 → MVP 개발 → 정부지원 → 후속투자 → 자금 소진)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굳혀졌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이 믿음은 모든 콘텐츠와 활동의 바탕이 되고, 이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믿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4개의 기둥을 진양 뉴스레터 브랜드와 대조해보니, 각각이 기능적 신뢰성과 감성적 연결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앞으로 인수한 주방잡화 커머스 브랜드에도 이 구조를 그대로 적용해, 빠르게 시장에 런칭하고, 볼트온하며, 제조 실험까지 이어갈 생각입니다.
결국 브랜드는 거창한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하며 쌓아 올린 고객과의 신뢰 구조물이더군요.
언젠가 또, 그 결과를 ‘진양 브랜드 해부 보고서’로 들고 오겠습니다.
이번주 에피소드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좋은 콘텐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