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점점 싸진다. 그럼 비싸지는 건 뭘까?
Fable을 보며... AI가 정답을 찾아주는 시대, 좋은 베팅은 어디서 오는가?
안녕하세요 진양입니다.
오늘 새로운 LLM 모델 Fable이 나왔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주변 창업가들이 다시 AI FOMO에 휩쓸린 느낌이에요.
요즘 새 LLM 모델이 나올 때마다 비슷한 분위기가 반복됩니다.
처음엔 신기하다가, 다른 사람들 구현 사례들 찾아보면서 “와 진짜 여기까지 가능하다고?” 싶어지고. 이것저것 응용해서 지금 제 업무 환경에 적용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다가 동시에 묘하게 무서워집니다.
저 또한.. 단순히 ‘코딩이 대체될까 봐’를 넘어서, 이제는 ‘창업자로서의 나를 대체할까 봐’가 무서워지는 구간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옛날에는 창업이라고 하면
시장 조사하고, 고객 욕구 이해하고, 경쟁사 분석하고, 가격과 카피를 정하고, 시장 진입 전략을 짜고, 재무 모델을 만들고,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묵직하게 실행하는 것.
이게 창업가로서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결국 당시에 제가 잘하는 건 파편화된 데이터들을 취합해서 적당히 정답과 비슷한 방향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었는데.
요즘 AI를 쓰다 보니.. 이게 정말 장점으로 삼아도 되는건지..? 이 믿음이 조금씩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데이터를 취합해서 적당히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저와 달리, AI는 아예 정답을 찾아버리거든요.
심지어 이 정답 찾기도 조금씩 더 싸지고 있고요. (물론 Fable은 아직 너무 비싸지만…)
근데, 사업이 정말 정답 찾기 게임이었나?
위 내용 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사업을 ‘잘 한다’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사실 정답을 찾는 능력에 가까웠어요.
주어진 고객 데이터 같은 외부 환경을 해석하고, 직감을 섞어서 회사의 방향을 조타하는 것. 근데 요즘은 이런 것들을 AI가 더 잘해줍니다.
가령 어떤 SaaS를 인수할지 고민한다고 가정해볼게요. AI한테 데이터 다 넣고 물어보면 됩니다. 이 회사의 매출 유지율이 어떻게 되는지. 고객 집중도가 어떻게 되는지. 가격이 적정한지, 경쟁사는 누구인지,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싹 다 리서치해서 알려줍니다.
커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출 데이터, 광고 데이터, 원가 데이터, 리뷰 넣으면 싹 다 나옵니다. 예전이라면 밤새 야근하면서 엑셀 돌리고 머리 싸매야 나왔을 것들이 딸깍 하나로 나오는 세상.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질문이 생깁니다.
“어, 그럼 나는 뭐하지? 뭐해먹고 살아야하지?”
AI가 나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빨리 비교하고, 나보다 더 냉철하게 분석하고, 심지어 반대 의견까지 싹 다 정리해서 정답을 알려준다면, 제 창업가로서의 역할은 뭐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 애초에 정답을 찾는 능력이 정말 사업가 역량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걸까요?
창업의 정답과 베팅은 다르다
LLM 모델들의 발전 속도, 창업 생태계의 변화를 고려해서 요즘 제가 내린 창업에 대한 임시 결론은 이겁니다.
AI는 주어진 정보를 기반으로 정답을 점점 더 잘 찾아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답’에 돈과 시간을 거는 주체는 여전히 사업가인 저입니다.
정답은 앞으로 계속 싸질껍니다.
하지만, 정답 찾기가 싸질수록 오히려 비싸지는 건 ‘그 정답에 베팅하는 사람’입니다.
정답 찾기가 싸질수록 정답 후보는 많아지거든요. 그럴듯한 정답 후보들이 무한개가 됩니다.
AI의 선택지는 모두 말이 됩니다. A도 말이 되고, B도 가능성 있고, C도 리스크는 높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습니다….
옛날에는 몰라서 행동을 못하던 세상에서, 이제는 너무 많이 알아서 행동을 못하는 세상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해지는 건 “베팅을 잘하는 창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베팅은 경험에서 나온다
좋은 베팅은 단순한 용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무식하게 지르는 걸 베팅이라고 부르면 안 되죠. 그건 도박이에요ㅋㅋㅋㅋㅋ
좋은 베팅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근데 여기서 경험은 “프레임워크를 많이 안다”거나 “책을 많이 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돈을 걸어본 경험. 실제로 운영해본 경험. 실제로 틀려본 경험. 실제로 빠져나와본 경험. 이런 것들입니다.
예를들어, AI도 좋은 인수 체크리스트를 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빠르게요. 하지만 그 질문의 무게를 아는 건 다릅니다.
무인매장을 예로 들어볼게요. 숫자상으로는 간단해 보였습니다. 말은 무인인데, 막상 운영해보면 청소, 진열, 결제 오류, CCTV, 재고 보충, 위생 관리까지 결국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그걸 1년을 해보고 나서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인수하는 사업의 매출의 품질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구나.
이 문장을 알기까지 1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1년이 다음 베팅의 기준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생기는 게 있습니다. 저는 그걸 “확률 감각”이라고 부릅니다. 좀 추상적인 개념이긴한데..
예를들어 어떤 선택지를 봤을 때, “이건 70% 정도 되겠다” “이건 상방은 큰데 하방이 너무 깊다” “이건 실패해도 배울 게 많다” “이건 좋아 보여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이런 판단을 하는 감각입니다.
AI는 확률을 계산해줄 수 있습니다. 근데 작은 사업에서 중요한 확률은 데이터만으로 나오지 않아요. 데이터가 너무 부족합니다. 표본이 작아서 백퍼센트 의지하기 힘들어요. 예를들어, 계약서에는 없는 구두 약속이 실제 운영에는 더 중요할 때도 있고요. 아니면 갑자기 인수한 매장에서 쥐가 튀어나올수도 있는거죠!!!!ㅋㅋㅋㅋ
암튼, AI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정량 데이터와 논리 정리입니다. 이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근데 그걸 보고 “그래서 나는 얼마를 걸 것인가”를 결정하려면, 결국 내 안에 누적된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해보니, 좋은 베팅은 결국 이 공식에 가깝습니다.
f(정답 후보들의 품질, 경험으로 보정한 확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손실)
이 세 개가 합쳐져야 좋은 베팅이 되는 느낌.. 정답 후보만 있으면 리포트고, 경험만 있고 숫자가 없으면 감이고, 손실 감당 범위 없이 지르면 도박입니다.
문제는.. 개인이 경험을 쌓기 어려운 시대
특히 우리 같은 개인은 더 그렇습니다.
대기업이나 PE는 여러 딜을 봅니다. 많은 사업체를 보고, 많은 숫자를 보고, 많은 실패와 성공을 조직 안에 쌓습니다. 누군가는 인수하고, 누군가는 운영하고, 누군가는 매각하고, 누군가는 망한 딜을 복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조직 전체에 감각이 쌓이죠.
근데 저희 같은 개인은 그게 어렵습니다.
인수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고요. 운영 한 번 해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매각까지 가보는 건 더 어렵고요.
저도 지금까지 인수를 7번 정도 했지만, 여전히 매번 새롭습니다. 사업체마다 다르고, 매도자마다 다르고, 고객마다 다르고, 제가 생각한 하자와 실제 하자가 또 달라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이런 작은 사업체들은 7번으로도 부족합니다. 한 70번쯤 하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일 것 같은데, 개인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죠.ㅋㅋㅋㅋ
정리해보면, 앞으로의 창업자의 역량은 “정답을 얼마나 잘 찾느냐”보다 “경험을 얼마나 빠르게, 작게, 많이 쌓느냐”에 가까워질 것 같아요.
큰 베팅 한 번으로 인생을 바꾸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에게는 작은 베팅을 여러 번 하면서 감각을 쌓는 게 더 현실적입니다.
작게 사고, 작게 운영해보고, 작게 틀려보고, 작게 빠져나와보고, 그 결과를 기록하고, 다음 베팅에 반영하는 것.
AI 시대에는 이 반복이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생각의 속도는 AI가 올려주지만, 경험의 속도는 여전히 몸이 따라가야 하니까요.
마무리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저는 여전히 무섭습니다. 사업가의 뇌라고 믿었던 것들이 점점 자동화되는 느낌이 드니까요.
근데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남는 건 정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정답에 책임지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 책임지는 능력은 배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경험에서 나옵니다. 돈을 걸어보고, 시간을 걸어보고, 틀려보고, 복기하고, 다시 조금 더 나은 확률로 거는 것.
결국 사업을 잘한다는 건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좋은 베팅을 반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답은 점점 싸지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더 싸질 겁니다.
그럼 비싸지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요즘 그게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돈과 시간을 걸어본 경험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