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한 SaaS, 당분간 안 키우기로 했습니다
막상 SaaS를 샀지만, 아직 키우지 않는 EU
안녕하세요, 진양입니다.
새롭게 인수한 SaaS가 정식으로 저희 것이 된 지 약 3주가 지났습니다.
계약서 상으로 완전히 넘어오고, 실제 오퍼레이션이 저희 손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건 2주 정도 됐고요…!
혹시 SaaS를 인수했다고 하면 보통 어떤 업무를 시작한다고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예를들어..
광고를 키고.. 랜딩페이지를 고쳐서 팍팍 결제가 일어나게 한다거나
아니면 가격제를 바꾼다나
아니면 개발 역량을 활용해서 신규 기능을 팍팍 출시?
아니면 AI를 붙여서 자동화를 파파팍?
저도 예전에 처음 사업체를 인수할때는 당연히 그런 걸 먼저 하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근데 막상 몇 번 이것저것 인수하고 나니, 제일 먼저 해야하는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이 SaaS를 성장시키지 않기로 했습니다.
..?
좀 이상하죠.
SaaS를 샀는데 왜 안 키우냐. 인수했으면 빨리 매출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MRR 올리고, 전환율 올리고, 그로스 실험 돌리는 게 맞는 거 아니냐.
저도 그 유혹이 있습니다. 숫자를 보고, 코드를 보면 보면 바로 손이 근질근질해져요.
“인스타 광고 아주 쬐~~끔만 붙이면 되지 않을까?”
“온보딩 한두 군데만 고치면 전환율 올라가지 않을까?”
“이 기능 하나 만들면 핵심 고객들이 더 오래 남지 않을까?”
근데 지금은 일부러 그 생각을 꾹꾹 누르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인수하고 이 욕망들을 꾹꾹 누르는 이야기입니다.
SaaS 인수 후 첫 3주 동안 제가 왜 성장을 미뤘는지. 대신 어떤 것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인수한 SaaS에서 “좋은 데이터 포인트를 쌓는 것”이 왜 성장 아이디어보다 먼저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수 후 가장 첫 번째 일은 제품이 아니라 시간 정리였습니다
SaaS를 인수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제품을 뜯어고치는 것도, 신규 기능을 기획하는 것도, 광고를 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시간을 비우는 일이었습니다.
인수했던 무인매장은 정리했고, 인수한 커머스 롤업에 들어가던 시간도 더 줄였습니다. 단기 근로자로 시작하셨던 물류 팀원분은 정직원으로 전환했고, 역할과 책임도 더 나눠 드렸습니다.
그 외에도 강의, 책 번역, 현금흐름형 투자건까지.. 월 단위로 현금흐름을 만드는 모든 프로젝트들을 전부 다시 점검했습니다.
현금 회수의 건정성이 어떤지. 현재 현금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간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어떤 프로젝트는 이미 회수가 끝났는지, 어떤 프로젝트는 아직도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지.
점검 하다보니, 열어보니 현금흐름형 프로젝트가 총 8개나 있었습니다. 엑셀을 펼쳐놓고 하나씩 적어보니 꽤 많더라고요.
다행히 회수력이 느려진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이미 원금 회수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손실을 크게 보거나, 회수를 위해서 강제적으로 시간을 써야하는 구조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결론이 났습니다.
이제 SaaS PMI에 시간을 써도 된다.
이게 첫 번째 마일스톤이었습니다. (사실 인수 전에 정리해야하는 내용이긴 했지만.. ㅠㅠ)
인수창업에서 시간을 잘 관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매출도, 수익도 좋아서 좋은 매물이라고 생각해도, 운영에 사용 가능한 시간이 없으면 좋은 인수가 아닙니다. 특히 우리처럼 여러 현금흐름형 자산을 동시에 들고 가는 팀은 더 그렇습니다. (롤업형 인수는 특히..!)
성장 ㄴㄴ 회수 ㅇㅇ
이전 글에서도 썼지만, 우리가 SaaS를 인수하는 목표 중 하나는 2~3개의 SaaS를 롤업해서 건강한 현금흐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 SaaS가 공통으로 쓰는 비용을 묶고, AI를 활용해서 운영 비용을 낮추는 것도 목표고요.
그래서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저는 이번 SaaS 인수의 핵심이 “인수한 자산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지 않아도 회수되는 상태로 만드는 것” 에 있다고 봅니다.
성장은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근데 성장은 공짜가 아닙니다.
신규 고객이 늘면 CS가 늘어납니다. CS가 늘면 운영 비용이 늘어납니다.
신규 고객은 새로운 기능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기능은 개발 비용이 되고, 개발 비용은 다시 유지보수 비용이 됩니다.
인수를 하고 “일단 성장!”을 외치면,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젓게 됩니다.
기능을 만들었는데 기존 고객은 안 쓰고, 신규 고객은 들어왔는데 손이 오히려 더 많이 간다. 저는 이게 SaaS 인수에서 제일 무서운 구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수 가격을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았어도, 회수 구조를 망가뜨리면 좋은 인수도 나쁜 인수가 됩니다. 반대로 회수 구조만 잘 지키면, 평범해 보이는 자산도 좋은 자산이 될 수 있고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인수는 똑똑한 사람이 영혼을 갈아 넣어야 겨우 회수되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인수는 바보가 운영해도 회수되는 구조에 가깝습니다.
물론 진짜로 바보처럼 운영하면 안 됩니다 ㅋㅋㅋㅋ
그래서 제일 먼저 좋은 데이터 포인트를 쌓고 정리하기 시작
기존 매출이 어디서, 왜,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냥 감으로 아는 수준이면 부족합니다. “대충 이 채널에서 들어오는 것 같다”, “아마 이 기능 때문에 결제하는 것 같다”, “예전부터 이 정도 매출은 나왔다” 정도로는 의사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인수한 사람 입장에서는 기존 히스토리를 모릅니다.
창업자가 몸으로 알고 있던 맥락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고객들이 왜 들어왔는지, 어떤 고객이 오래 남았는지, 어떤 고객이 결제까지 갔는지, 어떤 시점에 이탈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첫 마일스톤은 기능 개발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먼저 만든 것도 그 구조였습니다.
거창한 데이터 플랫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BI를 만들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v1은 단순해야 합니다. (다행이 기존 팀이 metabase를 쓰고있어서, 해당 패널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구현..!)
우리가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은 딱 세 가지였습니다.
돈은 누구한테서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 (재무 스냅샷)
제품 안에서 실제 사용이 어떤식으로 일어나고 있는가. (제품 사용성 스냅샷)
앞으로 새 고객이 들어올 길이 충분히 구성되어 있는가. (퍼널 스냅샷)
Metabase에 들어가서 기존 DB에서 볼 수 있는 숫자를 꺼냈습니다. Google Sheet에는 GA와 블로그 쪽 데이터를 붙였습니다. 그렇게 유입부터 설치, 사용, 결제까지 한 줄로 이어보는 작업을 했습니다.
재무 스냅샷에서는 MRR, 유료 고객, 결제 상태, 고객별 매출 기여도 같은 것을 봤습니다. 단순히 “월 매출이 얼마다”를 보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 매출이 얼마나 분산되어 있는지, 특정 고객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음 결제에서 깨질 위험은 없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인수한 SaaS에서 월 매출 숫자 하나는 별로 많은 걸 말해주지 않습니다.
월 1000만 원을 벌어도 상위 고객 하나가 40%를 차지하면 무서운 숫자입니다. 반대로 월 300만 원이어도 고객이 잘게 분산되어 있고, 사용성이 단단하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숫자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매출의 질입니다. 이건 제가 인수 이야기를 할 때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매출은 크기보다 지속성이 먼저입니다.
사용성은 매출의 증거입니다
그다음은 사용성 스냅샷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보고 싶었던 건 “설치가 되어 있는가”가 아니었습니다.
설치는 생각보다 약한 지표입니다. 설치는 해놓고 안 쓰는 경우도 많고, 과거에 설치했다가 방치된 경우도 있습니다.
진짜 보고 싶었던 건 고객 조직 안에서 실제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래서 단순 이벤트 수를 그대로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따로 보고 싶었던 건 “돈을 낼 이유가 되는 사용” 이었습니다.
예를들어 사용성이 약해지는 유료팀은 케어 대상입니다. 반대로 무료 사용자들인데 사용성이 강한 팀은 전환 후보입니다.
혹은 설치했는데 첫 사용까지 못 간 팀이 많으면 온보딩 쪽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반대로 사용 이벤트는 많은데 코어 이벤트들의 비율이 낮다면, 그 팀은 제품 경험의 문제를 경험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막연한 “성장”이라는 단어에도 수 많은 디테일이 숨어있는거죠!
유입부터 전환까지 한 줄로 이어봤습니다
마지막은 퍼널 스냅샷이었습니다.
이건 제품 내부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매출과 사용성은 제품 안에서 볼 수 있지만, 유입은 밖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GA와 블로그 쪽 자료를 같이 보고, 이걸 활성 데이터랑 같이 섞었습니다.
검색에서 얼마나 노출되는지. 검색 클릭은 얼마나 나오는지. 설치 페이지에는 몇 명이 들어오는지. 설치 CTA는 얼마나 클릭되는지. 실제 설치까지 얼마나 이어지는지. 설치 후 14일 안에 활성화되는 팀은 얼마나 되는지. 그중 현재 유료로 살아남은 팀은 얼마나 되는지….
이렇게 재무, 사용성, 유입 등을 다 쪼개서 보니 명확하게 개선해야하는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인수자는 창업자보다 조금 덜 낭만적이어야 합니다
창업자는 자기 제품을 낭만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만든 이유가 있고, 고객과 나눈 대화가 있고, 밤새 고친 버그가 있고, 언젠가 만들고 싶었던 기능 목록이 있습니다.
그 낭만은 중요합니다. 그게 제품을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이니까요.
하지만 인수자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합니다.
이 제품이 왜 팔렸는가. 누가 돈을 내고 있는가. 그 돈은 다음 달에도 나올 가능성이 높은가.
그래서 회수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조금은… 차갑게 봐야 합니다. 이 차가움이 제품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오래 들고 가려면, 제품을 감정이 아니라 현금흐름과 운영 구조 위에 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SaaS를 단기적으로 팔기 위해 인수한 게 아닙니다. 건강한 현금흐름을 만드는 자산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좋은 제품”이라는 말보다 “회수 가능한 제품”이라는 말이 먼저 와야 합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더 안 키울 생각입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래서 당분간 이 SaaS를 크게 성장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알고 싶습니다. 누가 왜 쓰는지. 누가 왜 돈을 내는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성장은 그다음입니다.
인수한 사업을 바로 키우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듭니다. 저도 사람이라서, 숫자를 보면 “이거 광고 조금만 붙이면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기능 하나 만들면 전환율 올라가지 않을까?” 같은 생각도 들고요.
근데 지금 필요한 건 액셀을 밟는 게 아니라 계기판을 고치는 일입니다.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데 속도를 올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좋은 인수는 “이거, 내가 별짓 안 해도 돈이 계속 들어오는 구조인가?” 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SaaS 인수의 첫 3주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이번 주는 여기까지!




